▲ 북코리아 '니체의 아름다운 옆길' 발간/ 지은이 천경     © 북코리아

[뉴스브라이트=구세주 기자] 난해한 니체의 철학적 사유를 독자들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미있고 유려한 문체로 풀어 쓴 <니체의 아름다운 옆길>이 최근 발간돼 화제다.


이 책은 작가 천경이 지난 2017년 11월부터 2019년까지 7월까지 국내 한 신문사에 <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이라는 제목으로 매주 게재한 내용을 엮어서 출간됐다. 가볍고 재미있으며 깊은 울림을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니체의 아름다운 옆길>의 수록 글들은 현재 다음 브런치 사이트에도 여러 편이 게재되어있으며 천경 작가는 다음 브런치의 니체 관련 추천작가이기도 하다.

<니체의 아름다운 옆길>은 저자가 니체의 전작(全作)을 통독하면서 니체 철학의 여러가지 개념들을 생활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재미있게 풀어 썼다는 장점이 있다. 일상의 가벼운 스케치로 시작되는 이 책의 이야기들은 매 편마다 매우 쉽게 읽히지만, 니체 철학의 깊이를 땀 흘려 담아낸 흔적이 돋보인다. 특히 비유와 상징의 문체로 씌여진 난해한 니체의 저서를, 일상 생활에 적용해서 한편 한편 담아낸 이야기들이라 설득력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이는 저자의 삶의 통찰과 오래 닦아온 문장의 힘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이 책의 문장 중에는 유머 코드가 행간마다 숨어 있어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쉽고 평이한 문장들과 일상 생활에서 길어올린 에피소드로 구성되는 각 챕터마다 영원회귀 사유, 힘에의 의지, 주인도덕과 노예도덕, 위버멘쉬(초인)와 인간말종, 신의 죽음과 보편진리의 유무, 그리스도교의 폐해와 가치의 전도, 아모르파티(운명애) 등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들이 소상히 소개되고 있어 니체 철학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때문에 난해하지 않게 니체 철학을 이해할 수 있으며 재미있게 니체를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만의 장점이다.
말하자면 이제까지 없었던 방식으로 쓰여진 철학적 해설서이며 에세이집이라는 설명이다.

기존의 철학 해설서가 지닌 난해하고 복잡한 문장과 문맥들이 깨끗이 정리되어 산뜻하고 선명하게 니체 철학의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종종 배꼽잡는 유머까지 행간에 숨어있다고 하니, 눈여겨 읽어본다면 누구나 재미와 인식의 ‘벼랑에서 한발을 더 내딛는 자’의 희열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철학이 어렵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평소 철학에의 입문을 꺼렸던 사람들이라면 도전해 볼 만하다. 

니체 철학을 이해하고 싶지만 어려워서 엄두를 못 낸 사람들에게도 유용하지만, 이미 니체의 저서를 접한 독자들이라면 더 재미있고 깊이 있게 책 속의 메시지들을 소화할 수 있다고 한다.

저자 천경씨는 <>인문학 공부를 하고 싶지만 어려워서 망설이는 분 <>니체에 대해 알고 싶지만 저서가 방대해서 엄두가 안 나는 분 <>책을 읽으며, 명랑하게 웃고 싶은 분에게 책을 권한다고 밝혔다.

특히 현재와는 다른 삶과 사유을 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니체는 큰 울림과 만만찮은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한다. 니체를 읽고 나서 저자는 큰 충격을 경험했다고 한다. 자신이 그동안 지켜온 소신들이 해일처럼 부숴지는 경험. 그것은 평화로운 일상에 균열을 내고 지금까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갖게 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하는 위험과 놀람의 세계였다는 설명이다. 니체는 그만큼 위험하고 충격적인 망치와 도끼였다고.

저자는 “니체는 나의 안일한 내면의 평화를 깨트렸고, 믿었던 가치관과 존경했던 금언들이나 좋아했던 취향마저 나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회의, 세상에 대한 핑크빛 감흥과 삶에 대한 환타지를 일순간 뒤흔들었다”고 말한다.

니체를 만나고부터 세상은 다른 색깔과 다른 질감으로, 다른 관점과 다른 경쾌감과 명랑함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 해서 저자는 니체를 만나 울고 웃으며 굿판을 벌이듯 글을 썼다고 말한다.

“니체는 내가 믿어 의심치않는 모든 것들에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라고 말하며 망치를 들고 다가왔다. 그리고 이 현실의 온갖 가치와 덕목과 칭송되던 행위들과 사랑스러운 가족의 얼굴, 평화롭게 지내던 이웃의 친절한 말들, 즉 나의 ‘환영’(幻影)을 되비추어주던 모든 것에 사형선고를 내리듯이 그것들의 민낯을 까발렸다. 그것들은 나의 민낯이기도 했다.

나의 평화와 안전을 지탱해준 얄팍한 지지대, 혹은 의지처 같은 것들, 나와 동류의 이데올로기를 지닌 그 무엇에 대한 안도와 그 안도에 복을 빌며 제사 지내고 경배하는 어리석음, 그 어리석음에 대한 경배. 그것은 그러니까 호모사피엔스종(種)인 내가 이 삶을 버텨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허위의식들, 허구들, 가짜들, 오류들의 집합이며, 이 삶을 참아내기 위해 꼭 필요한 거짓 덩어리들이었다고 니체는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단호함에 놀라고 예리한 통찰과 용기에 놀라, 살아온 생 전부를 돌아보게 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런데 한편 이처럼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니체의 문장들은 너무나 가볍고 경쾌하고 명랑해서 저자는 다시 놀랐다. 특히 니체는 웃음을 독자들에게 권한다. 망치는 망치로되 웃음과 유머가 넘치며 춤추는 망치, 니체!

특히 저자는 자신이 많이 웃지 않은 성격적인 특성을 감안해 니체을 읽고부터는 많이 웃으며 살 것을 자신에게 추천했다고 한다. 이 책을 쓰면서 저자는 많이 웃고 울었다고 말한다.

<니체의 아름다운 옆길> 그러니까 이 책은 한마디로 재미있고 웃긴다는 것이다. 철학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웃어도 될까? 답은 웃어도 된다! 아니 웃어야 한다고. 니체는 '웃음은 웃음의 미래'라고 주장하고 있으니까. 이 책 <니체의 아름다운 옆길>에 대해 저자는 “진지한 철학을 논하면서 배꼽 빠지게 웃는 역설, 글이 저희끼리 웃고, 글을 쓰는 동안 나도 글과 함께 웃었다”며 책이 재미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행간의 재미를 찾아내고 웃음의 코드를 발견해 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웃음은 의미들을 희화하는 힘이 있으며 웃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와 담론을 허무는 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물론 한바탕의 큰 웃음만이 책의 전부일 수는 없다. 니체 철학이 그렇게 단일한 맥락으로 쉽게 정리되지는 않는다.

저자는 책을 쓰는 동안 “니체의 친구가 되어 웃으며 놀았다”면서도, 또 니체는 재미있다면서도 니체에게로 가면 갈수록 위험하고, 위험한 만큼 후련하고, 더 많이 니체를 알고 싶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알고싶지 않고, 차라리 모르고 싶어진다고 고백한다. 니체, 그 숱한 비밀의 문들의 은밀한 내부로 들어가는 열쇠같은 니체를 정면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니체를 직면하고 감당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저자의 말을 들어 보자.
“그것은 지금의 내 삶을 통째로 망치질을 해야 하는 순간과 대면하는 사태로 나를 데려갔다. 이만하면 괜찮아, 하고 자신을 위무하며 조용조용 이 삶의 얼룩진 흔적들과 상처들에 연고를 발라주고 자신을 다독이며, 간신히 웃으며, 용감한 척 가면을 쓰고 살고 있는 나약한 실존에 메스를 가한다. 그 망치와 메스가 실은 명랑한 웃음이며 경쾌한 춤이더라도 웃음과 춤과 명람함은 무서운 망치이며 칼이며 도끼가 되어 지금 나의 욕망의 화로에 내리꽂힌다. 그런데 알고보니 도끼와 망치는 한바탕의 큰 웃음이었다. 웃음은 가볍되 다른 차원과 다른 평면으로 나를 데려가는 웃음이었다”
해서 저자에게 니체의 웃음은 열쇠이며 니체를 따라 저자는 웃었으며 그의 글도 웃었으나 그것은 어떤 다른 지점에서 나타나는 웃음이다. 말하자면 니체의 사도라 할만한 미셀 푸코의 “한 번도 되어 보지 않은 자신 되기”와 비견되는 경험이라고 할수 있을까? 

저자는 아름다운 니체의 옆길에서 놀고 웃고 춤추고 명랑하게 살라고, 그러나 그 웃음과 춤과 명랑함이 주는 망치를 기꺼이 감당하라고 니체를 대신해서 말하는 것 같다.

천경씨는 현재 홍대 인근 대안연구공동체에서 프리드리히 니체, 미셀 푸코, 질 들뢰즈,  레비스트로스 등의 저서를 읽고 공부하는 잡종의 책 읽기 모임을 매주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고독, 혹은 빨강색에 대하여>와 <내 안에는 작은 아이가 산다> <키스해도 돼요?> <주부재취업처방전>등이 있다.
 
<본문 문장>
겨울은 내 앞에도 뒤에도 나무 가지에도 하늘에도 땅에도 건너편 호수에도 와 있다. 눈과 겨울은 어느 순간 내게로 우르르 스며든다. 어느새 눈 한 뭉치와 겨울 한 자락이 내 안에 들어와 있다. 이질적이며 차가운 이것들은 나의 내부에서 나를 촉발한다. 눈덩어리는 나는 멈추게 하고, 놀라게 하고, 춥게 하고, 화나게 하고, 나의 동일성을 방해하며, 나를 약 올린다. 나를 침략한다. 나를 사유케 한다. ‘모든 사유는 침략’이다. 이 느낌, 나쁘지 않다
-당신을 침략하고 싶다 중

니체는 이렇게 말하는지도 모른다. 네 옆에는 네가 가지 않은 무한개의 길이 있다. 네가 가지 않은 무한개의 모르는 세계가 있다. 무한개의 견해와 무한개의 사랑과 무한개의 슬픔과 무한개의 고통과 기쁨이! 그것은 게슈탈트적 전환처럼 전혀 다른 세상이다. 이제 세상의 풍경이 통째로 바뀐다.
-신은 죽었는가? 중
 
그러나 이 순간을 긍정하기란 부드럽고 유머가 있고 가볍고 명랑하다. 비눗방울처럼 나비처럼 새처럼. 니체가 말하는 긍정이란 두손 두발 다 들고 항복하는 무기력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스스로의 주인인 내가 이 순간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와 관련된다. 반응적인 긍정이 아니라 적극적인 긍정. 나의 변화를 통해 도달하는 긍정이다. 더 풍요로운 나에게로 가는 방식, 넘치는 나의 힘의 흐름과의 만남. 변화된 나와의 만남은 타자와의 만남도 변화시킨다. 이렇게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이 순간은 축복이다. 필연이다. 이 순간이 축복이 아니라면 삶은 두렵고 황폐한 사막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순간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다. 이 순간이 영원이 회귀한다!
-영원회귀와 죽음 체험 중
 
나무를 생각한다. 나무는 스스로 나무임을 긍정한다. 해서 땅에 단단히 착근하고 더 멀리 더 깊이 뿌리를 내리며 더 높이 상승한다. 나무는 한순간도 동일하지 않다. 매번 다른 잎을 틔우고 다른 꽃을 피우며 다르게 산다. 하지만 대지에서의 삶을 부정하지 않으며 영원회귀의 삶을 반복하여 살아낸다.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고 푸른 싹과 울긋불긋 단풍잎을 만들어가면서 춤추듯이 가볍게 살고 있다. 나무의 언어는 운명애의 기록이며 나무의 언어는 춤의 기록이 아닐까?
-아모르파티 중
 
옷 수거함에 안 입는 옷을 버리듯이, 상대방이 오히려 큰소리치면서 가져가도록 베푸는 사랑을 하라고, 그것도 내가 속한 무리인 이웃이 아닌, 멀리 있는 자에게 주라고 니체는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구걸하게 한 후 적선하라’는 성자의 조언에 이렇게 대답한다.
“나 적선 따위는 하지 않지. 나 그 정도로 구차한 것도 아니고.”
인간말종과 위버멘쉬의 차이점이다.
-인간말종과 위버멘쉬 중
 
고정불변의 보편 진리라는 것이 있을까? 보편 과학이라는 것이 있을까? 니체는 개별 '진리들'이 있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과학이란 세계에 우리가 부여한 해석이며, 언제든지 더 나은 해석이 나올 경우 새로운 과학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퇴장해야 하는 운명이다. 그러니까 진리도 과학도 한시적으로만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진리라는 번개 중
 
인생사에 고정불변하는 것이 없다. 절대적인 진리도 없고 절대적인 선도 악도 없다. 니체는 신념을 ‘절대적인 진리’로 고수하는 것을 성숙하지 못한 증상으로 간주한다. 인간의 역사는 이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한 역사였다는 것이다.
이 세계를 ‘생성’으로 보는 니체에게는 어찌보면 신념이라는 말 자체가 아이러니로 보일 것이다. 세상은 단 한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하는데 신념이라니? 생성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운동과 시간이 전부인 세계. 거기서 신념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가? 신념 때문에 타인을 죽이는가? 신념 때문에 배제하고 구분 짓고 경계 짓는가?
신념을 진리의 적으로 보는 니체에게 나는 오늘 묻고 싶다. 이 세계에서 신념 없이(견해 없이가 아님!) 잘 사는 방법이 무엇인가?
-진리의 적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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